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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섭, 한국,남자

by 서담유영 2025. 4. 7.
한국, 남자
《잉여 사회》,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의 저자인 사회학자 최태섭이 한국의 남성성을 분석한 『한국, 남자』.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른 젠더 문제에서 지금까지 초점은 여성의 문제에 맞춰져 있었다. 저자는 그 나머지 반절, 성별 질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남성성을 중심으로 젠더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부상하고 있는 ‘남자 문제’를 살피고, 2장에서는 보편자로서의 남자가 아니라 개별자로서의 남자라는
저자
최태섭
출판
은행나무
출판일
2018.10.29


이미 백 번도 넘도록 논쟁을 한 바 있는 주제라 ‘읽어봐야 내 속만 답답하지’ 생각하며 읽기를 미뤄왔던 책이었다. 역시나 읽는다고 무언가 해결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나 방바닥을 팡팡 두드리는 심정으로 인덱싱을 했고 마지막 266-268쪽에 이르러서는 두 장을 그대로 찢어다 스캔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이번 시국을 지나오면서 ‘팍팍한 취업난과 치열한 경쟁’을 2030 남성 트롤화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의견들이 잘못됐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팍팍함은 같은 시대를 맞닥뜨린 2030 여성들도 못살게 굴었고, 그 강도가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럼에도 누군가는 광장에 나와 연대하고 기부하는 사이 극우/인셀/트롤을 자처한 것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몇 년 전 책에서는 단편적으로 전망하던 것들이 이제는 슬슬 수면 위로 떠오르기에 이른 듯 싶다.

이 사회와 국가가 그것을 용인했기 때문에 남성들은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한다. 근본적으로 근대적 국가 체계는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래서 읽는 내내 공감도 했고 속이 시원하기도 했으나, 그들을 추방하고 아마조네스가 되기는 쉽지 않으므로 무엇을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 것인가하는 답답함은 여전하다.


[11] 여성 혐오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여론은 누군가가 주목을 받기 위해 나서면 그에게 관심을 주며 더 과격한 행동을 부추기다가, 그가 실제로 선을 넘고 처벌을 받으면 빠르게 '손절‘한다. 이들은 이런 행위 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이 냉혹한 세상의 법칙이고 제때 손절하 지 못한 이들이 잘못이라고 단정하곤 한다.

[46] 한국이나 일본이 미국과 서구에 비해 좀 더 '성차별적인 탓에 해나 로진이 미국에서 발흥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가모장제'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가 여전히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 구조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서구보다도 더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아시아 는 노동 조건이 쇠퇴함과 동시에 안 그래도 허약했던 사회적 안전망도 해체되어 각자가 알아서 재주껏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51] 여자를 상대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전근대적 마초들 대신에, 소수자 정치의 외피를 맥락 없이 뒤집어쓰고 나타난 새로운 남성들은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내 가족만은 지켜내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부장이 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요컨대 이들은 가부 장제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제의 수혜를 누리겠다는, 양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101] 식민지의 남자들은 일본 제국의 남자들과 똑같은 남자가 아니라 '여성화된' 남자다. (중략) 민족주의적인 팽창의 열망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이들은 많은 경우 더 근대화되고 발전된 체제인 일본의 제국주의에 투신했다. 일부는 저항자로 남아 식민지가 된 조국을 되찾아줄 강력하고 신화적인 남성성의 도래를 기다렸다. 일부는 국가와 민족과 상관없는 근대인이 되고자 했지만, 이등 시민에게는 허락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들은 애꿎은 처를 때리며 울분을 달래고 골방에 틀어박혔다.

[123] 이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76년부터 3년에 걸쳐서 벌어진 동일방직 노조의 투쟁이었다. 노조 지도부 선거에서 기존의 어용 남성 지도부를 이긴 여성 지도부를, 회사와 경찰과 어용 노조가 한패가 되어 탄압했던 사건이다. 여성 노조원들은 경찰과 회사 편을 드는 (남성) 노동자들에 맞서 알몸 시위를 하기도 하고, 그들이 투척한 똥물을 맞는 등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많은 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사측에 제시하는 보상에 매수되어 여성 지도부 탄압에 동참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런 물질적인 이유 외에도 "남성들이 여성이 주도하는 노조 지도부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남자들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133] 한 공수부대원은 우리는 가족이 있으면서도 집에 가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반면에 학생들은 아무 실정도 모르고 자기네들 하고 싶은대로 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고 사회의 그늘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그들은 편하니까 우리를 이렇게 괴롭힌다"라는 것이 군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회고했다.

[135] 한국 사회는 단 한 번도 명령에 의문을 갖는 남자들을 바란 적이 없었다. 공장과 전장에서, 명령에 순응하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헌신하는 강건한 육체들을 원했을 뿐이다.

[146] 거의 모든 에로 영화들은 쾌락에 몸을 맡기고, 쾌락을 통해 남성을 지배하려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질서로 복귀하거나 파멸하는 결말을 갖고 있었다. 카메라는 내내 여성의 몸을 관음하다가 급작스럽게 도덕적 판관이 되 어 여성을 심판했다. 이런 서사는 쾌락을 즐기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 부채를 무마하고자 함과 동시에, 남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적 일탈을 단죄함으로써 남성성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뜬금없는 전개가 보여준 것은 결국 도덕이며 봉합의 시도가 무의미하거나 허구적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155] 파멸하지도, 참회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여자이자,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여자다. 남자는 자신에게 의존하는 여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그러니 의존하지 않는 여자들은 남자에게 모종의 거세 공포로 다가온다. 자유로운 여자들을 계속해서 벌하려는 남자들의 서사는 이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특히 통속적이고 성적인 작품들은 이중의 욕망에 시달리는데, 자유로운 여자의 몸과 성적 행위를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관음의 욕망과, 그 여자를 벌함으로써 다시 정상성으로, 즉 가부장제로의 복귀를 꾀하는 안전에 대한 욕망이다. 이는 여자에 대한 이중의 착취를 뜻한다.

[163] 이들은 1990년대 하층 계급 남성들의 좌절에서 비롯된 일탈이 가 장 극단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들이 생각하는 상층계급의 삶이란 부(10억)와 섹스(야타족)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삶이고, 이들은 그런 상태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분노했을 따름인 것이다. 결국 이들이 행한 일이라고는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더 열악한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는 것이었다.

[169] 가족주의 담론은 성별 분업을 정당화하고, 남편과 가족을 위해 정서적 치료사의 위치가 부여된 여성상을 정서적인 외피로 포장했다. 가족주의는 경제 위기로 인한 삶의 위협과 불안정에 대한 처방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었던 것이다.

[173] 아버지들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아내의 부재라는 것은,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니라 가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더해, 이런 일상을 유지하는 능력의 부재가 커다란 몫을 차지한다. 또 최근 늘어나고 있는 50대 남성들의 '고독사'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과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독거 여성들에 비해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189] 2000년대 한국 사회 남성성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자기 피해자화‘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208] 된장녀의 반대에는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적절하게 외모를 가꿀 줄 알고, 너무 높지 않은 기준의 대상과 연애를 하며, 상대방을 정서적, 성적으로 케어하는(기를 살려주는) 여자가 있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여자들에 게 "너 된장녀지?"라고 물어보는 것으로 여성들이 행동을 교정하고 자기 검열을 강화하도록 만든다.

[213]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문장이 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자아냈던 것은 단지 한국 사회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3센티미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180센티미터라는 기준이 새롭게 제시하는 바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도태될 수도 있다는 지점이었다.

[214] 가부장제적인 권력 자체는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음에도, 여전히 그런 관계 안에서만 여자와 남자 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남성들은 자신에게 주도권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여 성과의 관계에서 박탈감과 분노(나를 무시했다)를 느낀다. 그러나 무엇이 이들로부터 박탈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이들의 부모 세대도 가부장/남성으로서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박탈은 상상적 박탈이다.

[218] 자신들을 포함하여 남자들은 모두 여성의 성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래하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지위에서 여성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질시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이 '항의'가 뜻하는 바는 여성들의 성이 너무 비싸다'라는 뜻에 가깝다. 비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막장'이자 '잉여인 우리(남자)들에 비해 비싸고, 내가 그것을 얻기에도 너무 비싸다는 뜻이다.

[228]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게 정말로 경제적/사회적 의존을 하길 바란다기보다는, 적은 노력과 투자로 의존에 뒤따르는 신뢰와 존경만을 보내주길 바라는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방식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의존을 하거나 말거나, 왕자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그저 메갈 혹은 여성이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을 비난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진실은 이 두 개가 섞인 어딘가 쯤에 있을 것이다.

[249] 이런 영향력이 주는 즐거움은 엄청난 것이어서, 트롤들은 그야말로 성역 없이 조롱과 모욕을 일삼고 조작이나 왜곡도 불사하곤 한다. 자존감이 낮고 현실의 삶이 왜소할수록 이런 영향력의 유혹은 더 강력해 진다. 하지만 유혹에 비해 이것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경각 심은 낮다.

[253]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남자들이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 "남자가 피해자다"라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군대에도 가야 하고, 데이트 비용도 내야 하고, 결혼하고 나면 돈 벌어 오는 기계가 되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들은 좋 아진 세상에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군대를 가지 않고) 권리만 요구하며,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페미니즘이나 메갈리아가 등장해서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지적하는 것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자들이 나를 존중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로서 나의 권리인 것이다. 이 진술은 대부분의 사회 지표와 통계를 무시해야 가능한 것이다.

[264] 사회적 소수자의 존재와 그들이 겪는 고통, 그리고 내가 그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은 평온을 위협한다. 이럴 때 비겁한 자들의 선택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공격 하는 것이다. 한국의 남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모두 여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 상황은 정확하게 이 도식과 일치한다.

[266] 하지만 이 조건이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여성 청년들은 이와 똑같은, 실은 오히려 더 처절한 조건 속에서 배운 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껴야 했다. 심지어 청년 담론마저도 공정하지 않았다. 청년 담론 속의 청년은 너무 자연스럽게 남자로 상정되었다. (중략) 청년 여성들도 취업을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청년 남성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결혼해서 가정으로 사라질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청년 여성들은 좁은 경쟁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고, 청년 남성들은 세대론을 면죄부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

[267] 단 한 번도 남자들은 온전한 가부장이었던 적이 없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었거나,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떠난 가장이었거나, 죽어서 없는 존재였다. 아버 지는 없거나 없는 게 더 나은 것이었지, 존경받고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은 아니었다. 한국의 남자들은 오랫동안 그럴 필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빠의 청춘'류의 가부장 신파 역시 일종의 자기 미화에 더 가까웠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로 먹여 살릴 능력이 되었던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희생은 자기 연민을 위 한 소주잔에 따라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한국의 청년 남성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도 함께 쌓았다. 여자는 남자의 돈만을 원하며 여자는 모두 잠재적 꽃뱀이고 결혼하면 남자는 돈 버는 기계가 될 뿐이라는 불만이, 결혼도 취업도 하지 않은 젊은 남자들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꽃뱀은 돈이 없는 남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돈 버는 기계란 그나마 돈를 벌 수 있을 때의 일, 더 정확하게는 돈을 벌어다 줄 사람이라도 있을 때의 일이다.

[268] 이런 이상한 화법이 알려주는 것은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정신분석학까지 갈 필요도 없이,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여자에게 의탁하고 있다. 이들에게 여자란 일이 잘못되었을 때 탓할 수 있는 대상이자, 성욕 해소를 위한 도구이자, 나중에 자신의 삶이 본궤도에 올랐을 때 자신의 아내가 되어 내조와 살림과 대리 효도와 육아를 담당할 어딘가에 있을 나를 위한 '개념녀’다! 이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자라기보다는 어떤 환상 속의, 더 정확하게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환상 속에 존재하는 여자다. 이 환상을 승인한 것은 가족과 사회다. 남자들을 동원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유보하고 미래를 위한 몰입으로 이끌기 위해, 불만을 잠재우고 순치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여자의 환상을 남자들에게 제공하고, 교육하고, 방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