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추적단 불꽃
- 출판
- 이봄
- 출판일
- 2020.09.23
N번방이 언론에 보도되고 주변이 발칵 뒤집혔던 2020년을 기억한다. 불법촬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너무 일상적인 공포였기에 새삼 두려움을 말하기에도 민망했으나 범죄자의 숫자로 보도된 것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규모보다 너무 큰 숫자였다. 당시 개인적인 상황들로 바빴지만 할 수 있는 방법들로 연대했었다. 그러나 매일 이 사실들을 기억하고 분노하는 것은 나의 일상과 정신건강에 해로웠기 때문에, 어쩌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일부러 눈을 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공론장에서 발언하고 연대할 뿐인데도 해코지를 당하거나 평판에 문제가 생길 것을 걱정하는 것은 2025년의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최전선에 나서지 못하면서 미안함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 최전선에 있는 이들 역시 나와 같은 개인이라는 것을 가끔 상기하면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문제제기와 공론화에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이들도 두려워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까이서 체감한 올해의 광장에서의 경험이 내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끊임없이 말하기 위해서 계속 문제를 직시해야 하기에 더 괴롭고,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닌지 죄책감이 들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변이나 일상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 없다는 점에 자괴감까지 드는 고충을 불꽃의 추적기에서도 뒤늦게 발견하고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정작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해야 하는 이들은 그런 감정이라곤 알지 못하는 것같다. 어떤 부조리를 들여다봐도 그렇지만, 정말 반성해야할 사람은 당당하고 피해자를 걱정하는 사람들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최근 본 기사에선 후쿠시마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제주를 방문해 제주 해녀분들께 사과를 했다고 했다. 이들을 피해자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려는 것은 아니고, 연대를 목적으로 만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피해자에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들이다. 제주항공 참사 당시 무안공항을 찾은 것은 이태원 유가족들이었고, 이태원 유가족들이 시민 연대서명을 받을 때 먹을 것을 나누고 조언과 위로를 나눈 것은 세월호 유가족분들이었다고 들었다.
인지상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51] 경찰이 검거에 나섰는데도 공권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런 일조차 놀이로 삼는 공간. 살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듯한 자들. 대체 이들은 어떻게 살아왔기에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놀 수 있는 걸까.
[62] 2020년 4월, 손정우의 인도 심사가 결정되자 그의 아버지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미국 송환은 가혹하다'는 내용의 청원을 올렸 다. 7월 6일 한국 법원은 사법 주권을 지키고 국내 성착취물 소비자들을 원활하게 수사하려는 목적으로 '미국 송환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 렸다. '한국 법원의 결정'으로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였던 손 씨는 2020년 7월 6일, 자유의 몸이 됐다.
[70] 어느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은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것이냐?"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될 수는 없지 않느냐?"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듭니까?" 같은 발언을 했다. 국회의원들이 N번방 사건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로 느껴질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국회의원들의 처참한 인식 수준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203] 사건을 취재하던 몇 달간 가장 기다려온 순간이었는데도 기쁘기는 커녕 서럽고 억울했다. 이제 와서 관심을 가지는 권력자들에게 화가 났다. 동시에 내가 그동안 제대로 나서지 못해서 피해를 키운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가족들이 안위를 걱정할까봐 씩씩한 척 했지만, 실은 나도 가해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무서웠다.
[264] 피해자가 한 행동이 상식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성범죄에 한해서는 '피해자로 서 완벽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보호하겠다는 인식은 틀렸다. 피해자의 말, 글, 행동을 평가하여 합격 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난하고 의심한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 때문에 성범죄 피해자는 세상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당할 만해서 당하는 피해자는 없다. 이 부분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겠으면(설혹 싫더라도) 그냥 외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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