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권여선
- 출판
- 한겨레출판사
- 출판일
- 2024.09.15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맛깔나게 쓴다는 것은 이런 거였지. 오랜만에 떠올리게 하는 권여선의 글이었다. 분명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혀 끝에 맛이 느껴지는 듯하다.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었음에도 위로를 받았다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49] 이렇게 갖가지 김밥을 말아놓았다고 해서 글이 엄청 잘 써지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쓰다 배고프고 우울해져 다 때려치우는 자포자기 사태를 방지하는 효과는 있다.
그게 어딘가. 어쨌든 김밥은 착하다.
[125] 그릇에 담긴 국수 말고 나만의 냄비에 담긴 뜨거운 국수를,
살짝 숨이 죽은 쑥갓부터 건져 먹고 반숙인 달걀 노른자를 호로록 먹고
양념장을 한꺼번에 풀지 않고 조금씩 국수에 끼얹어 먹는 식으로, 그렇게 나만의 스타일로 먹고 싶다.
[161] 국물, 국물, 하고 중얼거리다 보면 온갖 종류의 국물 맛이 혀 밑에 잔잔히 깔리곤 한다.
육류를 곤 국물도 뼈냐 힘줄이냐 살이냐 껍질이냐에 따라 맛이 다르고,
해물을 곤 국물도 생선류냐 조 개류냐 해조류냐 알류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이러저러한 고기-해물-채소를 섞어 맛국물을 낼 수도 있으니 국물내는 방식의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또 동치미, 열무김치, 나박김치 등 발효된 국물의 맛은 또 얼마나 다른가.
좋은 재료를 제대로 우려내거나 발효시킨 모든 국물은 죄다 맛있다.
[186] 내 조그만 자취방은 금세 맛난 고기와 조개, 양념 냄새로 가득했다.
훌륭한 만찬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러울 게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드디어 어머니의 집 밥의 시대가 끝나고 내 집밥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집밥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내 손에 달렸다는 것을.
[183] 집에서 해 먹는 게 집밥이라면, 집집마다 그 집 부엌칼을 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죄다 소박하면서 맛깔날 수 있단 말인가.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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